[욕망의 정치] 야구 이야기 그리고 망조가 든 스팀잇을 떠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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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e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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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이야기로 시작할게. 헤르메스가 경력 14년차의 '사회인 야빠'라는 건 아는 형들은 다 아는 이야기일 테고... 최근 몇 주 동안 겪은 실제 상황부터 간단하게 소개한 후, 하고픈 이야기를 이어갈테니 뜬금없다 생각말고 읽어주길 바래. 아래 장면들은 각기 서로 다른 경기에서 벌어진 일이야.

장면 1. "어? 죄송합니다. 내가 정신이 없네..."

자기 타순이 되어 타석에 섰던 타자가 이렇게 말하곤 뒷주머니에서 타격 장갑을 꺼내서 주섬주섬 끼기 시작했어. 갑분싸. 날도 덥고 하니 그 분 말대로 정신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겠지만, 그때 상황은 달랐어. 공수 교대 때 느릿느릿 늑장을 부린다든가, 대기 타석에서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타석에 등장한다든가 하던 차라, 누가 봐도 상대팀이 '지연 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거든. 어때? '침대 축구'는 들어봤어도 '침대 야구'는 처음 들어봤지? ㅋㅋ

참고로 사회인 야구에는 시간 제한 규정(대체로 2시간)이 있어서 정해진 시간이 되면 새 이닝에 들어가질 못해. 당시 이기고 있던 상대팀이 이 규정을 악용한 거지. 어쨌든 우리 팀은 경기에 졌고, 종료 후 양 팀이 라인업했을 때 우리의 현명하신 심판께서 한 말씀하셨어.

"선수 여러분들은 시간에 신경쓰지 마시고 열심히 경기를 즐기시면 됩니다. 시간은 저희 심판들이 알아서 챙기니까요. 다들 야구를 재밌게 즐기러 주말에 귀한 시간 내신거 아닌가요?"

그러자 상대팀 감독이 이렇게 목소리를 드높여 항변하더군.

"시간 제한 있는 건 사회인 야구만의 규정이고, 그 규정을 이용하는 것도 전략 아닌가요? 그것도 사회인 야구만의 묘미라고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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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결과. 마지막 공격때 4점차까지 따라붙었으니 한회 더 했더라면...?

장면 2. "뭐하러 해요? 그냥 집에 가요."

경기 시작 전, 양 팀의 선수들이 라인업을 했어. 정상적이라면 심판에게 주의사항 듣고 서로 악수하고 경기에 돌입하는 거지. 그런데 본부석에서 심판을 불렀어. 상대팀 선수 한 명이 부정 선수라는 거야. 알고보니 신입 선수의 경우 경기 5일 전까지 온라인으로 야구협회에 등록을 해야 하는 규정을 어겼던 거였어. 이유는 상대팀 감독의 착오... 결국 상대 팀 선수가 딱 아홉 명이라 리그 규정상 몰수 경기가 선언되었어.

문제는 그 다음. 우리 팀 감독은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양팀 다 인원 수는 되는 만큼, 비공식 연습 게임이라도 하자고 제안했어. 양팀 합쳐서 20여 명의 사람들이 헛걸음하는 것보다는 승패 상관없이 경기를 즐기자는 거지. 우리의 착한 심판께서도 그 말을 듣고 연습 게임이지만 심판을 그냥 봐주겠다고 하셨어. 그러자 상대팀 감독은 선수들에게 의향을 물었지. 반응은 의외였어.

"에이, 어차피 졌는데 뭐하러 해요? 그냥 집에 가요."

한 선수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니 다들 집에 가자는 분위기가 되더군.

결국 경기는 무산되었어. 우리 팀에게 남은 건 1승과 몰수 경기에 따른 보상금 20만원. 상대팀에게 남은 건 1패와 몰수 경기에 따른 벌금 20만원이었어. 그런데 말야. 상대팀에게 남은 게 과연 그것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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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수 경기는 공식적인 기록에 이렇게 남아. 승리 팀 선수의 개인 기록은 모두 3타석 1타수 1안타 2사구로 처리되지.

게임의 목적

장면1에서 상대팀 감독의 항변을 듣고 우리 팀 사람들은 굳은 표정에 쓴 입맛만 다셨을 뿐, 악수와 함께 축하 인사를 끝내고 덕아웃으로 돌아왔어. 썰렁한 분위기도 풀 겸, 내가 팀 동료들에게 웃으며 말했지.

"아니 시간 끌기 게임을 하려면 왜 야구를 하시나? 축구를 하시지..."

축구 팬들께서 들으면 기분 나쁠 수 있지만, 내 진의는 단순한 거였어. 야구를 하는 목적이 뭐냐는 거지. 물론 행위의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상대론적 주장을 펼칠 수도 있을 거야. '시간 끌기도 사회인 야구의 전략'이라는 상대팀 감독의 주장도 그런 부류에 속하겠지. 정해진 규칙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그 어떤 행위든 용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면에서 앞의 글에서 말한 '소극적 자유'와도 맥이 닿지.

장면2 또한 마찬가지일 거야. "어차피 진 경기, 뭐하러 하냐?"는 항변 또한 각자 행위의 목적이 다르다는 측면에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테지. 그런데 말야. 양팀 도합 20여 명의 사람들이 뜨거운 여름날 경기장에 모인 이유가 뭐지? 공식 리그 경기에 1승을 기록하기 위해서? 그 기록을 남겨서 어따 쓰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차피 진 경기'라는 선수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는 힘들거야.

장면 3 "그럴 수 있어. 별 일 아니지? 즐겨~!"

지금 소개하려는 경기는 야간 경기였어. 밤 10시부터 자정무렵까지 이어진... 이 경기가 이런 한밤중 경기가 된 건, 원래 낮 2시 예정이었는데 폭염 때문에 양팀 합의와 리그측 양해로 밤10시로 조정된 거였어. (야구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지. ㅋㅋㅋ)

아무튼, 사회인 야구가 프로야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선수들이 '프로'가 아니라는 거. 실력 차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프로 선수들은 경기하다 다쳐도 연봉이 나오지만, 사회인 야구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야. 그래서 사회인 야구 불문율 중의 하나가 '무리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는 거지. 지금 말하려는 경기에서도 '갑분싸'한 순간이 있었어. 그것도 두번 연속.

먼저 더블 플레이 상황에서 상대팀 선행주자가 우리팀 유격수의 1루 송구를 방해하는 행위를 했지. 나도 10년 전쯤 2루수를 보다가 비슷한 상황에서 돌진해오는 주자랑 부딪혀서 엄지 손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는 아찔한 경험도 했었어.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오른쪽 엄지 관절의 움직임이 완전치 않아.

다행히 직접적인 신체 접촉은 일어나지 않아 수비 방해까지는 아니었던 고로, 타자 주자는 1루에서 세이프가 됐고, 마침 감독을 겸하고 있던 그 주자가 대신 사과를 하더군. "저 친구 학교에서 야구는 했지만 사회인 야구는 올해가 처음이라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그말을 듣고 1루 수비를 보던 내가 팀원들에게 소리쳤어.

"그럴 수 있어. 별 일 아니지? 즐겨~!"

그런데 잠시 후, 또 미묘한 상황이 벌어졌어. 1루 주자의 리드가 길었고, 우리 투수가 견제구를 던졌는데 방향이 쏠려서 방금 그 주자의 가슴 옆 쪽을 강타했지 뭐야. 전후 상황상, 상대 주자의 방해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대목. 순간적으로 상황을 수습해야겠다 싶었지. 통증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주자의 등을 감싸 안고 말했어.

"저 친구가 1루 견제를 하면 꼭 공이 슬라이더 성으로 들어와요. 내가 잡았어야 하는데, 미트가 못 따라갔네. 미안해요. 어떡해. 괜찮아요?"

순간적으로 한 말이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어. 1루수를 7년 가량 맡아온 경험상, 오른손 투수가, 특히 강속구 투수일 때는 1루 견제 때 몸을 비틀어서 던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송구에 스핀이 먹어서 주자 쪽으로 휘어 나가는 경우가 많거든. 어쨌든 투수도 모자를 벗고 1루까지 와서 사과를 하고 상대팀 주자도 웃음으로 양해해 줘서 그날 경기는 무사히 끝났어. 아니,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근래 보기 드문 명승부를 펼쳤지. 7회까지 이닝을 다 채운 1점차 승부였으니까. 비록 졌지만^^;;; 심판까지 마지막 인사로 "이게 야굽니다. 심판 보는 저도 재밌었어요."라고 할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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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인 사회인 야구 경기의 기록ㅋㅋ. 7회까지 이닝을 다채웠고 양팀의 점수가 적절하고 1점차 승부에 에러나 사사구의 숫자가 적은...

이기는 야구냐 즐기는 야구냐, 소극적 자유냐 적극적 자유냐

장면 1과 장면 2는 각각 루키 리그와 싱글A, 장면3은 더블A 리그 경기에서 벌어진 일이야. 이 말을 왜 하냐면 루키 리그는 신생 팀들이 많고 싱글A, 더블A로 갈수록 팀 실력에 비례해서 역사가 오래된 팀들이 많기 때문이지. 두 개의 팀에서 총 세 개의 리그를 뛰고 있는 내가 더블A 리그 경기를 더 재밌어 하는 이유는 팀들의 실력이 더 좋아서가 아니야. 사회인 야구 구력에 따른 여유, '매너' 때문이지.

루키 팀들은 '즐기는 야구냐, 이기는 야구냐'를 놓고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 팀 내 갈등의 원인이 되지. 야구하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상대론-소극적 자유'를 따르자니 각자 따로 노는 모래알 팀워크가 되기 십상이고, 리더가 이기는 쪽이든 즐기는 쪽이든 특정한 가치(적극적 자유)를 중심으로 경기 운영을 하다 보면 팀이 반쪽 나기 십상이야.

2004년에 팀을 창단해서 14년 동안 명예직인 단장 역할을 하며 느낀 건 이거야. '이기는 야구'와 '즐기는 야구'가 단기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둘은 결국 '하나'라고...

장면3에서 1점차 패배를 기록한 후, 팀 미팅 분위기는 재미있는 경기 이후의 보람 더하기 '자성'의 분위기였어.

"내가 마지막에 홈런만 안 맞았어도..." (변화구가 한 가운데 쏠려서 1점 홈런을 맞은 투수)

"아냐, 내 잘못이야. 변화구 사인을 줄 상황이 아니었어." (포수)

"에이, 아까 뜬공 놓친 내 잘못이지. 그거 에러였어." (중견수를 맡은 감독)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그 순간에 삼진이 뭡니까?" (마지막 공격 2아웃 2-3루 상황에서 삼진 먹은 4번타자)

"아냐, 오늘 진 건 우리 팀에 40대가 많아서 그래. 다들 노안이 와서 야간 경기를 하니 공에 초점을 못 맞추더라고..." (나 ㅋㅋ)

이렇게 한바탕 웃고 서로 등 두드려주고 다음 경기의 승리를 기약하며 헤어졌어. 우리 팀 자랑 같지만, 이런 팀 분위기 때문에 오랫동안 롱런하면서 리그에서도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거라 나는 믿어.

맺는말: 우리 모두는 루키, 스팀잇은 루키 리그

야구 이야기가 길었지만 눈치 빠른 형들은 결론을 이미 예견하고 있을 거야. 즐기는 야구냐 이기는 야구냐를 놓고 갈등하는 루키 팀처럼, 스팀잇에선 어뷰징, 보상 배분 등을 놓고 여러 가지 열띤 논쟁들이 수차례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갔고 그 때마다 자유방임, 소극적 자유의 목소리와 합리적 개입, 적극적 자유의 목소리가 충돌했지.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스팀잇은 너무나 고요해. 서너 달 만의 변화치곤 너무나 극적이야. 평화가 아닌 적막, 1달러가 채 되지 않은 스팀 가격까지... 객관적으로보면 '망조'가 든 건 부인할 수 없어.

그런데, 헤르메스 너는 왜 이곳에 머물러 있냐고? 그건 스팀잇이 아직 '루키 리그'이기 때문이야. 출중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은 많으나 팀 경력은 모두 일천한... 그리고 '팀'을 만들 수 있는 환경 또한 아직 만들어져 있지 않은... (도대체 하이브마인드와 커뮤니티스는 언제...?;;;)

즐기는 야구와 이기는 야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임을 깨닫는 데는 우선 시간과 경험이 필요해. 앞서의 글에 빗대자면,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충돌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각자의 자유를 '비지배 자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 또한 마찬가지지. 다시 말해 자의적 간섭과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자유가 서로 만나 더 큰 자유로 수렴, 확산될 수 있는 질서를 조직하기에는 아직 경험과 훈련과 깨달음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거야.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까? 그건 물론 아닐 거야. 모두의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겠지. 이 글 또한 그러한 노력의 일부일 테고. 현명한 심판, 착한 심판, 지혜로운 심판이 되어야 할 스팀 재단의 역할도 중요한데 (여태까지는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지만) 그 또한 두고 볼 일이지. 그들도 아직 루키니까!

그러니 여러분! 루키 리그에선 그럴 수 있어. 별 일 아니니 그냥 즐기자구! 스팀잇을 하는 각자의 목적은 서로 존중하되, 야구판이 축구판이 되거나 축구판이 야구판이 되지 않도록 서로 배려하고, 단기적이고 개인적인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장기적이고 호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연습을 쌓아가면서 말이야.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생각보다 길어졌네. 그리고 한 가지 말 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댓글에 답글이 바로 달리지 않더라도 이해해주기 바래. 내일부터 나흘간 제주도로 떠나거든. 지난 제주 여행 이후 한달만이고, 올해만 네번짼데;;; 5만원이 채 안되는 특가 항공권의 유혹에 또 넘어가 버렸어. ㅋ 나 없다고 댓글 안달지는 말고... 밀린 답글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대로 정성스레 달 테니까... 그럼 그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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